취재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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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야기/여성

위안부 첫 증언 25년.. 여전히 정부는 없다

남지원 2016. 10. 13. 19:18

25년 전…김학순 할머니 “피 맺힌 한 풀어달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마련한 기자회견장에 나와 국내 위안부 생존자 중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 인생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로 끝났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은 피 맺힌 한을 풀지 못해서입니다. 내 청춘을 돌려주십시오.” 

25년 전인 1991년 8월14일, 당시 67세였던 고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마련한 기자회견 자리에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의 피해자였음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했다. 김 할머니의 증언이 도화선이 돼 다른 피해자들도 피해 사실을 밝히며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외교 문제를 넘어 전시성폭력 참상의 상징이자 아시아의 대표적인 여성인권 의제로 부상했다. 

25년 뒤…마르지 않은 눈물 속 ‘나비문화제’ 김복동 할머니(왼쪽)가 14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4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맞이 나비문화제에서 배우 권해효씨의 손을 잡고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하지만 지난해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당사자인 할머니들과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든 시민단체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됐다. 

“돈 주고 입 막아서 걷어치우려고 하지. 우리 정부에 돈이 없는가. 생각을 좀 해봐, 우리가 얼마나 상심했겠는지. 사죄하라 배상하라, 몇 십년 데모를 해도 데모한 값이 하나도 없잖아….”

지난 10일 경기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만난 이옥선 할머니(89)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25년간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과 사죄를 요구한 주체는 피해자들과 시민사회였다. 정대협 등 시민단체들은 1992년부터 1243차례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 시위’를 열었고 국민모금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했다.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나눔의집도 불교계와 여성계가 주축이 돼 민간모금으로 설립됐다. 

정부는 김 할머니 증언 이후에야 실태조사에 나섰고 1993년부터 법률을 제정해 피해자 생활안정자금 등을 지원했다. 피해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유엔 인권위원회에 위안부 문제가 상정됐다.

하지만 일본은 한·일 합의에서 피해자들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던 일본 정부의 위안소 설치·운영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군의 관여’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했다. 합의 이후 ‘화해·치유재단’ 설립, 일본 측 10억엔 출연 방침 최종 결정까지 모든 과정에서 위안부 운동의 주체였던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는 배제됐다. 

정부는 의견수렴 결과 위안부 피해자들 대다수가 합의에 찬성한다고 밝혔지만 피해자 의견이 제대로 수렴됐는지는 불분명하다.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은 “합의 이전 정부로부터 설명을 들은 바가 없다”고 했고 이인순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도 “합의 이후 정부는 할머니들을 찾아 ‘최선을 다했으니 이해해달라’고 호소했을 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 성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면 정부의 기념사업은 축소되고 있다.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지원예산은 사라졌고 초등학교 6학년 국정 사회교과서에서는 실험본에 있었던 ‘위안부’ 용어와 사진이 빠졌다.

“일본과 해결하려면 첫째로 우리한테 물어야 해요.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속닥속닥하고 다 해결됐다면서 위로금 얼마 줄 테니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어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25주년을 맞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나비문화제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91)는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는 위안부 문제가 처음 공론화됐던 25년 전처럼 정부 없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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